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문단 편집) === IHES 설립과 은둔 === [[파일: 그로센딕 노년.jpg]] 1958년, 그로텐디크는 수학자 장 디외도네의 지원으로 고등 수학 연구소인 IHES를 창설했다. 이 시기 1966년 [[필즈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동유럽에 전개되던 [[소련군]]의 군사 활동에 항의한다고 [[모스크바]]에서의 시상식에 불참했다. 그나마 [[그리고리 페렐만]]과는 달리 IHES 동료인 Léon Motchane이 대리 수상을 했다. 그러나 1970년, IHES가 프랑스 국방부의 군사용 연구 자금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그는 자신이 설립한 IHES에서 떠나며 잠시 수학 학계 자체를 떠났다. 또한 그로텐디크는 몸소 겪은 끔찍한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받아, '''[[아나키즘]]적·평화주의적인 정치 성향을 보였다.''' 그로텐디크는 이러한 정치 성향으로 인해 베트남 전쟁 중, 일종의 반전 시위로 미군의 공중 폭격이 가해지고 있던 베트남의 하노이 근교의 숲속에서 범주론 세미나를 연 적도 있었다. [[68혁명|1968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학생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는 이 운동에 영향을 받아 그의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는 1970년에 연구소에 사표를 내고, 반전 운동·반핵 운동·환경 보호 운동·생태계 보존 운동을 펼치며, 이를 위해 ‘생존’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이로 인해 이혼 등을 거치면서 가정은 붕괴됐고, 이들 운동을 위해 캐나다·미국·베트남 등지를 여행했다. 수년 후에는 그룹 내에서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아 많은 충돌이 일어나면서 결국 해체되었다. 1975년에 그로텐디크는 ''La Clef des Songes''라는 315페이지에 달하는 원고를 쓰는데 거기서 그는 꿈의 근원에 대한 고찰을 통해 신이 존재한다고 결론을 얻었다. 원고의 메모 중 일부로 시대를 앞서간 몽상가,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예언하는 이들에 대해 묘사했는데, 수학자로는 [[리만 가설]]로 유명한 [[베른하르트 리만]]이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간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크리슈나무르티]], [[표트르 크로포트킨|크로포트킨]], [[지그문트 프로이트|프로이트]], [[월트 휘트먼]] 등과 함께 있다. 이후 그로텐디크는 자신이 공부했던 몽펠리에 대학교에서 [[교수]]가 됨으로써 다시 학계로 돌아왔고, 1980년대 초반에 수학계에 컴백하려고 anabelian 기하학과 갈로아-타이흐뮐러 이론에 관한 연구 주제를 프랑스 수학계에 제출했으나 그의 연구 테마는 수학계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근데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이 abc 추측을 풀었다고 주장하여 현재 검토 단계에 있는 모치즈키 신이치 교수가 여기에 대해 지난 10여 년 동안 계속 연구하고 있었고 실제로 abc 추측을 증명하였다는 수백 페이지 정도 되는 논문에 그로텐디크가 창안한 [[스킴(대수기하학)]]이론과 tale 및 l-adic 코호모로지 이론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http://m.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6144|링크]] 참조. 다만 논문에서 창안한 '내부 국소 타이흐뮐러 정리(Inter-universal Teichmüller theory, IUTT)'가 너무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어 이에 대해 필즈상 수상자 피터 숄체 등이 모치즈키 교수에게 의문을 제기해봤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고("오류가 너무 심각해서 약간의 수정 정도로 이 이론을 구해낼 수는 없어보인다.("so severe that … small modifications will not rescue the proof strategy")") 이내는 네이쳐 지에도 '모치즈키의 연구에 마음이 갈 사람이 그다지 없어보인다'고 실렸다. 교토대학교 내부 동료 검토 결과로는 문제가 없는 완전한 증명이라며 인정했지만 이에 동의하는 수학자는 그다지 많지 않은 상황이다. [[파일:그로센딕 은둔.jpg]] 1980년대 말에 완전히 은퇴하게 되는데, 이는 나이에 의한 자연스런 수순으로 보면 맞을 것이다. 28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환갑 때 학계를 떠났다. 은퇴 후 그로텐디크는 프랑스 남부의 농촌에서 농사로 소일하겠다며 자취를 감추었다. 이때 크라포르드상 수상도 윤리적 이유로 거절했으며, 학계는 물론 거의 모든 지인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크라포르드상 수상을 거부한 이유로 스스로 작성한 편지 내용([[http://www.math.columbia.edu/~lipyan/CrafoordPrize.pdf|편지]])은 다음과 같다. >Ganelius 교수에게 > >저는 오늘 받은 당신의 4월 13일자 편지와 전보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스웨덴 왕립 과학 재단에서 주는 (나의 학생이었던) 피에르 들리뉴와의 올해의 크라포르드상의 공동 수상에 대해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상(또는 다른 어떤 상)을 받는 것을 다음의 이유들 때문에 원치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 >1) 저의 대학교수로서의 월급과 연금은 독립적 생활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물질적 필요도를 충분히 넘습니다. 따라서 저는 더 이상의 돈이 필요 없습니다. 기초적인 부분에서 저의 업적의 뛰어남에 관해 저는 시간이 새로운 개념과 관점의 풍부함에 대한 유일한 결정적 테스트라는 것을 납득했습니다. 풍부한 업적은 후학들에 의해 이루어졌지, 영예에 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br][br]2) 더구나 크라포르드상 같은 명망 높은 상이 찾으려고 애쓰는 높은 수준의 연구가들은 대개 권력과 특권을 포함한 과학적 권위와 충분한 물질적 부 이상의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의 초부유함이 다른 이들의 궁핍함의 대가에서 비롯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 >3) 재단에서 주목하는 저의 업적은 과학계에 제가 몸담고 있었고 정신과 가치를 근본적으로 공유하고 있던 25년 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는 1970년에 과학계를 떠났고 저의 과학적 연구에의 열정을 유지하는 동안 마음 속으로는 끊임없이 과학적 환경에서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동료들 사이에서 노골적인 도적질(특히, 자신을 방어하는 위치에 있지 않는 사람들의 희생)이 거의 일반적인 룰이 되어버렸고 가장 명백하고 사악한 상황이 용서받지 못하는 상태가 된 시점까지 (적어도 수학자들 사이에서는) 과학계의 윤리가 떨어졌습니다. 이러한 경우 각종 수상식에 참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건전치 못하며 더구나 사라져야 할 운명으로 봐왔던 과학계의 정신과 경향에 동조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정신과 경향은 정신적으로나 지성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자멸되어야 합니다. > >이 세 번째 이유가 무엇보다도 가장 필수적입니다. 왕립 학회 기금의 운영에 있어 비판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번 세기가 끝나기 전에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사건이 과학과 목표, 과학적 업적이 이루어졌던 정신에 관한 우리의 관심을 완전히 바꿀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왕립 학회는 사람들과 기관들 사이에서 전례없는 조직 붕괴 후 전례없는 혁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위치에 설 것이라 확신합니다. > >저는 크라포르드상을 거절하므로서 당신과 왕립 학회가 불편해하는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며. > >(후략) by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말년에 몽펠리에 대학에서 지도하면서 시골촌에 살았는데, 그때 제자였던 윤석임 전 [[덕성여자대학교]] 교수가 그로텐디크에게 [[김치]] 담그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고 한다. 그런데 이에 푹 빠졌는지 그로텐디크가 10페이지 분량의 '''김치에 관한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http://www.ihes.fr/~damour/IMAGE/kimchi_grothendieck.pdf|Le Kimchi]] 또한 이때 신의 존재성을 받아들이며 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한다. [[2014년]] [[11월 13일]]에 별세하였다. [[http://www.liberation.fr/sciences/2014/11/13/alexandre-grothendieck-ou-la-mort-d-un-genie-qui-voulait-se-faire-oublier_1142614|관련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